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데르 6세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>'''탁월한 정치가이자, 행정가이자, 외교가이며, 선견지명이 있으며, 국제 정세를 보는 눈이 비상했고, 비상한 음모가이며, 유명한 [[정력|정력가]]였다.''' >---- >[[임용한]]. <[[토크멘터리 전쟁사]]> 中. 세간의 평가를 논하며. [[가톨릭]]의 제214대 [[교황]]이자 [[율리오 2세]] ~ [[레오 10세]]로 이어지는 '''괴물 교황들의 시작점'''이다. '''역사상 가장 타락한 [[교황]]'''으로 유명하며 '''[[뇌물]], [[돈세탁]], [[매관매직]], 친인척 비리 조장, 밀실 정치 등 정치판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[[부정부패]]와 패악을 저지른 인물이다.''' 그러나 [[정치]]적으로는 뛰어난 수완을 가졌고, [[권모술수]]의 달인에다가 [[대세#s-1|대세]]를 보는 능력이 워낙 탁월하여 업적도 많은 편인 복합적인 인물이기도 하다. 현대 [[역사학자]]인 새러 브래드퍼드의 평가에 따르자면 >'''"지혜, 정신적 활력, 건강, 국제적 행정 경험, 당당한 풍채… 오늘날 [[다국적 기업]]의 회장에게 요구되는 그런 자질들을 모두 갖추었다."''' 라고 했다. 그런 양반이 "왜 교황을 했냐?"면, 당시의 [[교황]]은 오늘날의 단순한(?) 범지구적 종교 공동체의 지도자라기보다는 [[FIFA]]나 [[IOC]]의 회장처럼 치열한 정치적 다툼에 의해 선출되고, [[종교|평화의]] [[스포츠|상징]]을 내세워 막대한 이권과 국제적 알력을 다루는 자리였기 때문이다.[* 위치는 [[이탈리아]] 반도에 위치했으나 여러 나라의 [[추기경]]들이 모여 선출되는 이가 [[교황]]이었기에 교황 또한 국적이 다양했다. 알렉산데르 6세만 보더라도 [[스페인]] 국적의 인물이었다.] 물론 이는 알렉산드르 6세를 철저하게 세속 [[정치인]]으로 해석한 관점이기 때문에 종교적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재평가니 뭐니 할 여지가 없다. 당장 이 사람 바로 다음 시대에 터진 [[종교 개혁]]의 지도자들이 [[가톨릭]]의 악행을 지탄하면서 써 먹은 떡밥의 많은 단골 레퍼토리를 제공하였으니 말이다. 다만, 종교인이 아닌 세속 정치인으로 보면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가진 지도자라고 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다. 실제로도 교회가 종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지를 제쳐놓고 본다면 교회 역사상 최전성기는 알렉산데르 6세의 재위 기간이다. [[카노사의 굴욕]]을 달성한 [[그레고리오 7세]]는 사실 당시 [[신성 로마 제국]]이 제대로 중앙 집권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[[파문]]을 때린 것에 [[제후]]들이 황제를 견제할 기회라고 보고 [[콜]]을 때린 것 뿐이었고, 후대의 [[명군]]이라 불리는 [[율리오 2세]]는 [[이이제이]] 정책만 줄기차게 쓰다가 이때 키워준 [[스페인]]이 그대로 [[신성 로마 제국 황제]] 자리까지 먹더니 '''[[사코 디 로마]]'''를 일으킬 발단을 만들어줬다. 반면 알렉산드로 6세는 강대국에 책잡히지 않는 무난한 외교책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인 [[체사레 보르자]]를 [[괴뢰국]](?)의 지도자로 앉혀 이탈리아 반도의 정복전에 나가 '''정말로 이탈리아 통일을 거의 달성할 뻔 하기도 했다.'''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체사레가 실각하는 일 없이 통일을 완수해서 그에게 갖다 바쳤을 것이라는 예상이 중론일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. 이런 업적 때문인지, [[식스토 5세]]와 [[우르바노 8세]]는 알렉산데르 6세를 >'''성 [[베드로]] 이후 가장 뛰어난 교황''' 이라고 높이 평가했다. 물론 이 두 사람도 각자 [[교황령]] 내에 횡행하던 [[도적]]떼 퇴치와 [[교황령]]의 방어 강화라는 업적을 남겼다. 다만 식스토 5세는 도적떼에게 내리는 처벌이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, 우르바노 8세는 [[족벌주의]]가 너무 지나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는데, 당시의 교황령에게 꼭 필요한 일을 했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저지른 필요악 때문에 비난받았다는 것은 알렉산데르 6세와 일치하는 부분이다. 워낙 독특한 인물이라서 그런지 그의 재위 기간을 그린 창작물에 꽤 자주 나오는 편이다. '''자식들'''[* 물론 교황은 혼인을 할 수 없으므로 모두 법적으로는 [[사생아]]인데, 대외적으로는 알렉산데르 6세의 [[조카]]라고 선언하여 '''[[보르자 가문|보르자]]'''라는 성을 물려주었다. 물론 실제로 조카가 아니라 자식이라는 것은 세상 모두가 다 알았다.]도 꽤나 유명하여 아들인 [[체사레 보르자]]는 [[마키아벨리]]가《'''[[군주론]]'''》에서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예찬한 바 있다. 딸인 [[루크레치아 보르자]]도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유명한데, 이쪽은 아버지와 오빠의 정치적 야망 때문에 아픈 개인사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후대의 창작물에서 [[요녀]]의 이미지를 뒤집어 쓴 희생양에 가깝다. 의외로 이 보르자 가문에는 [[성인]]도 있는데, 바로 체사레의 형제인 조반니 보르자의 손자이자 '''[[예수회]] 제2의 설립자'''라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 데 보르하 또는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 ^^(축일 [[10월 10일]])^^이다.[* [[율리오 2세]]를 끌어내리려 [[피사]] [[공의회]]를 개최하려다가 파문당한 프란치스코 데 보르자 추기경과는 [[동명이인]]으로, 떠도는 자료 중에 두 인물을 혼동하는 것들이 적지 않다.] 사실 알렉산데르 6세로서는 가장 타락한 교황이라는 말이 다소 억울할 법도 한게 [[중세]] 시대에는 타락한 교황이 1 ~ 2명이 아니었고, 찾아보면 별의별 엽기적인 행각을 벌인 교황들이 널렸다. 그러나 중세 성기 이전 교황들은 당시만해도 수백년전 사람들이라 잊혀졌고, 하필 [[종교 개혁]] 직전 교황이라 '''[[타락]]한 교황의 대명사'''로 언급되는 경향이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